행복한 일상나들이/이런저런 이야기

마음속에 쨍하고 해가 떴었는데....바로 지고 말았습니다......

윤주빠 2011. 10. 24. 23:47

청록파 시인 '조지훈'

청록파 시인 조지훈
  • 1920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 출생
  • 1931년 [꽃탑]소년회 조직
  • 1939년 문장3호[고풍의상], 문장11호[승무],동인지[백지]발간
  • 1940년 문장13호 [봉황수], [향문]
  •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편찬위원,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
  • 1945년 [국사교본] · [국어교본]편찬위원
  • 1946년 박두진, 박목월과 [청록집]발간
  • 1948년 고려대 문과 교수
  • 1949년 한국문과협회 창립위원
  • 지훈문학관 : http://jihun.yyg.go.kr

현대 서정시인 '오일도'

현대 서정시인 오일도
  • 1901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출생
  • 1925년 [한가람 백사장] 조선문단에 발표
  • 1929년 리교대학 철학부 졸업
  • 1932년 근화학교(덕성여중고) 교사
  • 1935년 시지[시원] 창간7,8호를 내다가 중단, [노변애가]발표
  • 1936년 [을해명 시선집] 발간 오월의 화단을 게재
  • 1938년 삼천리문학에 [송원의 밤] 발표
  • 조세림의 [세림시집] 간행
  • 조국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현대소설가 '이문열'

현대소설가 이문열
  • 194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08출생
  •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나자레를 아십니까?]
  • 1979년 [사람의 아들] 오늘의 작가상 수상
  • 1982년 15회 동인문학상 [금시조] 수상
  •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황제를 위하여]
  • 1984년 제11회 조선중앙문학상 [영웅시대]
  • 1987년 이상문학상 [우리들의 일그러진영웅]
  • 소설집 [변경],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그해겨울, 새하곡, 추락 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선택
  • 두들마을 : http://www.dudle.co.kr/

그밖의 문인들

이병각 (몽구)

  • 1935년 조선중앙일보 소설 [눈물의 열차] 발표
  • 1939년 [시학] 동인지 발행
  • 시22편, 소설3편, 수필7편, 평론13편 등
  • 특징 : 리얼리즘, 정열적인 천재적 시인

조동진 (세림)

  • 1932년 [소년회]를 조직
  • [향수], [오식된 청춘], [실춘보], [우울] 등
  • 특징 : 낭만적

이병철

  • 1943년 조광지에 시[고향소식]등단
  • [소], [새벽], [대열] 등
  • 특징 : 순수문학, 리얼리시즘

조애영

  • 1931년 배화여고에서 항일운동
  • [슬픈동경], [깊은 밤], [숨어 사는 신세]
  • 특징 : 시조시인, 서예가

이창환

  • 1952년 시집 [나리꽃] 등단
  • [태백], [애상], [월인애가], [청맥] 등
  • 특징 : 남성적, 낭만적

배익천

  •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달무리] 당선
  • [달무리], [빛이 쌓이는 마을] 등
  • 특징 : 휴머니즘적

오승강

  •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사림기행] 당선
  • [숲속에서], [공존], [피라미의 꿈] 등
  • 특징 : 리얼리시즘

황근식

  • 1976년 [표정]「심상」신인상 당선
  • [수수대의 꿈], [환상 시첩] 등
  • 특징 : 정통 서정시

오정국

  • 198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성지의 돌] 소설당선
  • [그리움 또는 증오],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등

김선굉

  • 1982년 심상지에 [우기의 시] 신인작품상
  • [쟝 주네를 생각함], [아픈섬을 거느리고] 등
  • 특징 : 서정적

정재숙

  • 1989년 [네 시린 발목 덮어]로 등단

황명자

  • 1989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강준용

  • 1952년 12월 08일 영양읍 서부동 219번지 출생
  • 1986년 8월 '월간문학' 신인상 응모에 단편소설[철석골의 막장] 가작당선
  • [개의행복], 희곡[무인도], [오색줄무늬왕사탕], 장편[스콜]등 70여편의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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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분들은 영양을 대표하시는 작가분들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김주영 작가분의 인터뷰기사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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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대하소설 객주 속편, 30년만에 쓰는 작가 김주영
"요즘 청년들, 부모 포켓속에 숨어 지내…보부상들의 열정 배워야"
2011년 09월 27일 (화) 09:30:20 [조회수 : 297]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 개울을 잇는 돌다리 위에서 소설가 김주영씨는 흥이 났다. 30년 만에 다시 쓰는‘객주’10편. 작가 뒤 야트막한 고개 너머부터가 울진 보부상길 12고개의 시작이다.

<조선일보 9월 5일자 36면 특집

30년만에 속편 집필하는 까닭은?
근력 달린다고 글 못쓰진 않아
리듬·열정 되찾는 게 관건일뿐 …
작가로서의 책무도 나를 부추겨

객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가족애 남달라 독립군에 자금 전달하듯
가족들에게 꼬박꼬박 돈 부쳐

보수·진보 갈등 어떻게 보나?
우리 사회, 네 편·내 편만 따져 범죄 저질러 놓고 정당화 부르짖어 … 강정마을 반대는
반국가적 행위 "이 개울을 건너면
울진 보부상 길, 열두 고개의 시작입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소설가는 징검다리 위에서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의 뒤편에는 철제 비석이 서 있었다.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 조선 후기 울진과 봉화의 내성장터를 왕래하던 행상 우두머리 사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철비(鐵碑)다. "3박 4일을 꼬박 걸어 봉화까지 60㎞를 걷는 거죠. 건장한 사내라면 이틀거리지만, 울진 특산 소금과 미역을 쪽지게에 실어 머리 위까지 얹은 보부상들 아닙니까. 무릎이 남아나질 않죠. 이 가난한 사람들, 이 팍팍한 길이 제게 다시 쓸 힘을 줬습니다."

소설가 김주영(72)이 '객주' 10권을 집필한다. 1979년부터 5년 가까이 신문에 연재했고 1984년 출판사 창비에서 총 9권으로 출간됐던 자신의 대표작 '객주'의 30년 만의 속편이다. 작가에겐 평생의 과제였지만, 아직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계획. 울진에서 작가를 만났다. '객주'를 계기로 시작했던 인터뷰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원형질로 명명했던 '숙명적 가난'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2011년 대한민국의 청년들과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직 평범한 사람들은 벌여 놓은 일도 정리할 나이입니다. 어떻게 결심을 하셨나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불안감이 생깁니다. 생이 끝나간다든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든지 하는 이유죠. 그래서 계획을 만들게 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벼르기만 하다가 지나가죠. 사실 '객주'를 9권으로 끝냈을 때부터 늘 미련이 남았습니다. 완전한 숫자가 아니잖아요. 별렀죠. 기회가 오면, 기회가 오면. 그때 울진과 이 보부상 길이 계기를 만들어 준 겁니다."

― 처음부터 웬만하면 10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을 텐데요.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신문에 매일 연재(총 1,465회)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단 한 번의 펑크나 휴식도 없었죠. 연재 막판에는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세 번이나 원고료를 올려줬고, 좀 쉬었다 다시 써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어요. 정말 저도 웬만하면 10권을 채우고 싶었지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 '객주' 이후에야 조선후기 상업사를 다룬 학위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분 중에 연세대 박원선 교수님이라고 있었습니다. 보부상에 관련한 논문을 '객주' 덕분에 쓰셨다며 여러 번 고마워했죠. 자랑이 아니라 그만큼 자료나 논문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객주'는 상상력이 아니라, 발과 땀으로 쓴 작품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장터에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어느 시골집에 그 지역 향토 풍속을 알려주는 군지(郡誌)가 나왔다는 얘기만 들어도 득달같이 달려갔었으니까요."

 

― 소설 객주 전집―왜 하필 지금, 울진이었나요.

"홍옥선이라고 울진 출신 산악인이 한 명 있습니다. 작년에 이 길을 제게 알려줬죠. 보부상이 걷던 길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답사를 했어요. 보부상 대장격인 행수의 공덕을 기리는 철비(鐵碑), 주막거리, 서낭당… 놀랍더군요. 이렇게 보부상의 다양한 현장이 남아 있는 길은 전국에서 울진이 유일합니다. 자괴감을 느꼈어요. 이런 길도 모르고 '객주'를 썼다니 말이죠.

― 임광원(52) 울진군수가 '객주'의 열혈독자라던데요.

"세 번이나 읽었다더군요. 고맙게도 울진 엑스포공원 내에 있는 군수 관사를 개비해 집필실을 마련해줬습니다. 하지만 금전적 지원보다는 집필의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이 더 고맙습니다. 올해 말로 자료조사와 답사를 끝내고 내년부터 집필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 작가의 대표작에 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없습니까.

"연재 당시는 가장(家長)으로서 '이것 없으면 생계를 못 잇는다'는 심정으로 전력투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의 책무'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책무'라는 게 있습니다. 글은 나이가 들었다고, 근력이 달린다고 쓰지 못하는 건 아니죠. 그때 그 리듬, 그 열정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제게 가장 큰 숙제입니다. 지금 객주 아홉 권의 요약본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잊어버린 리듬과 열정, 어휘 등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거죠. 누워있던 기억을 일으켜서 잊었던 열정을 불사르면 스스로에게 누가 되는 작품은 안 나오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선생 세대는 가난이 보편적 경험이었지만, 특히 유난하다고 들었습니다. '탯줄을 끊으면서부터 가난에 시달렸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해서 먹여 살려야 했죠. 도시락은 꿈도 못 꿀 시절, 초등학교 소풍날 우리 어머니가 고구마를 보자기에 싸 줘서 도시락이라고 들려 보낸 일이 있습니다. 선생이 불러서였던가 잠깐 다녀와 보니, 고학년 형들이 그 보자기를 축구공마냥 물가 모래밭에서 발로 차고 있는 거예요. 바위 뒤에서 일본 원숭이마냥 뻘겋게 모래 묻은 고구마를 혼자 몰래 먹으며 울었습니다. 가난이 아니었으면 난 소설을 안 썼을 겁니다. 가난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듭니다. 아부하게 하죠. 난 내 힘으로 그걸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파먹으며 우리네 인생살이에 대해 써왔죠."

― 그때부터 비롯된 특유의 기벽(奇癖)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년 동안 방이 아니라 거실에서, 그것도 불켜놓고 주무신다면서요.

"20년 훨씬 넘죠. 과장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방뿐만 아니고 어두운 곳에서는 잠을 못 잡니다. 불을 켜놔야 해요. 컴컴한 다방 같은 곳에는 안 들어갑니다. 어릴 때 나는 갇혀 살았어요. 벽장 같은데 숨어가지고 혼자 잠자고 그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말도 더듬었죠. 고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방을 나와 거실에서 자기 시작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면 죽겠다고 생각한 거죠. 내가 시골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와 혼자 살아가는데, 일가친척 하나 없는 대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를 고쳐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 방을 나오셨다는 건데, 그러면 부인께서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웃으며) 내가 결혼 이후 50년 가까이 지킨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도둑질과 사기, 이 두 가지만 빼놓고 어떻게 하든 돈을 번다. 그래서 내가 한 달에 집에 들여놔야 할 금액, 생활비는 반드시 갖다 준다. 내가 집에 잘한 건 하나도 없지만 이것만은 어겨본 일이 없습니다. 집에서는 물론 우리 집사람이 갑이고, 내가 을이죠."

― 지금 문제는 '상대적 가난'인데요. 특히 청년들의 박탈감이 큰 것 같습니다.

"객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사기꾼도 나오고 모사꾼도 나오고,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모두 삶에 대한 열정은 공통적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들이 전국을 떠돌면서 빼놓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거죠. 인편에 보내는 건데도 100%, 가족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마치 독립군에게 보내는 자금처럼 어김이 없어요.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죠. 청년들이 많이 힘들 겁니다. 하지만 부모의 포켓 속에 숨어서 눈치나 살피는 청년들도 많은 것 같아요. 희생정신과 가족을 생각하는 정신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 좌·우, 보수·진보와의 갈등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세상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겁니다. 이념의 논리로만 해석하는 거죠. 네 편이냐 내 편이냐만 따지는 세상입니다. 범죄를 저질러놓고 정당화를 부르짖는 세상이 말이 됩니까.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선거에 나오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주민들 대다수가 찬성하는 강정마을 사태나 4대강도 그래요. 내가 올해 초부터 KTV의 4대강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맡을까 말까 고민도 했죠. 그런데 내가 직접 현장을 다녀보니까 알겠어요. 특히 이번 폭우를 거치면서 수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100% 찬성 쪽으로 돌아섰어요. 정비를 안 했으면 황폐화될 뻔한 땅이 손톱만큼도 피해가 없었거든요. 여주에서는 환경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바꿔 찬성 플래카드까지 붙였더라고요. 예전에 4대강 반대하는 사람들 지금 입 꾹 다물고 있잖습니까."

― (웃으며) 너무 한나라당, 보수편만 드는 것 아닙니까.

"(정색하며) 제가 열린우리당 시절에 그 당의 공천 심사위원까지 한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강정마을 반대는 반국가적 행위예요. 나라를 수호하는 기지를 만든다는데 무슨 특별 비행기를 띄워서 막겠다니요. 나는 누구 편도 아닙니다. 양심을 갖고 하는 말이에요. 낼모레면 여든입니다. 평생 들판에서 산 사람이에요. 이 나이에 무슨 총리를 하겠습니까, 국회의원을 하겠습니까, 돈이 탐나겠습니까. 양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 어쩌면 '객주'는 30년 전의 작품입니다. 지금의 독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입니다. 평창이 세 번 도전 끝에 마침내 동계올림픽을 치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보부상의 끈기와 삶을 통해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 근성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민족의 서정적 정서입니다. 지금 세대가 그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는 거라고 봅니다."

울진=오종찬 기자 oic1979@chosun.com

   
 

☞ 김주영은

작가는 1939년 경북 청송 진보 출신이다. 학업과 가장의 의무를 병행하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10년 만에 졸업했다.
김주영 문학의 특징은 ‘가난한 자들의 의기 투합’.
1972년 월간문학에 ‘여름사냥’으로 등단했고,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1988) ‘천둥소리’(1986) ‘홍어’(1998)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가난한 한국인의 흥과 한을 특유의 맛깔난 토속어로 옮겼다.
대표작 ‘객주’는 유년시절 저잣거리에서 날품팔이를 했던 경험과 그때 만난 사람들의 삶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상인사회를 중심으로한 사회 변동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이 왕과 양반에서 민초로 바뀌는 ‘트렌드’를 이끈 작품이기도 하다. 약 10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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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

아직까지도 오지중의 오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한번씩 찾아오는 경북 북부 내륙의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땅.

생상물이래봐야 내세울만한게 고추밖에 없어서

젊은 사람들이 비비고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곳.

그래서 문화생활도 참 힘들것 같지만 나에게 영양이 제일 부러운건

수많은 작가들과 또 그들의 생가를 보존하고 가꾸어서

도시인들에게 문학의 향기를 계속 전해주는 곳이어서

항상 부럽고 또 부러운 그래서 질투심마저 생기는 그런 곳으로 다가옵니다.

울진에도 이현세라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작가가 있지만

아직은 울진군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홍보가 부족한것 같습니다.

만약 이현세씨의 생가를 복원하고 가끔씩 초청해서 사람들과 어울림 한마당을 만들어주면

많은 사람들이 울진을 자주 찾아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근데 최근에 울진군에서 참 착한 일을 했답니다.

객주의 작가로 유명한 김주영씨를 위해 엑스포공원내에 있던 군수관사를

기꺼이 집필실로 내줘서 작가의 집필활동을 지원했다는거죠..

처음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발빠른 사람들은 벌써 팬모임을 만들었고 늦었지만 저도 가입할려고 기웃거리는데

마침 그 모임의 총무님이 저랑 잘 아는 사이여서 말씀을 드렸더니

백산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콜.....

이렇게 오케이 사인은 받았지만 아직은 그냥 망설이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내뱉는 한마디는 파장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그런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떠들다가도 누가 밟으면 그냥 찍~~하고는 끝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들이대도 다들 아는 공인의 위치에서는

말한마디 행동하나가 이 사회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소용돌이를 만드는지

잘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해야하지않나 싶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써 시류에 편승하는듯한 발언은 좀..........

강준용작가의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그런 달인의 모습을 좀 보여주시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 사업......

저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나부랭이에 불과하고

그게 과연 옳은 일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저 아는거라고는

강은 강대로 산은 산대로 그리고

사람은 사람대로 그렇게 사는게 제일 좋은 방법인것 같은데.....

왜 굳이 물길을 바꾸고 또 산길을 바꾸면서

인간보다 더 나은 자연의 힘에 역행하는

그런 행동들을 자연보다 못한 사람들이 하는건지...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분의 책을 구입하고 작가분의 저 인터뷰기사를 주욱 읽어봤는데

4대강사업의 열렬한 지지자의 한분이시라는걸 알게 되었고

쪽팔리게도 헛된 마음으로 팬클럽에 가입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그냥 접었습니다.

어설프고 아둔한 제가 보기에도 4대강은 아닌것 같아서......

 

4대강 물길..

그냥 그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될지...

본인의 성과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세대가 아닌 후손들이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주시기를.... 

 

4대강은 절대로 청계천같은 작은 실개천이 아닐텐데..

물은 때로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는걸 모르시는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다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것이겠지요????

 

요기가 바로 김주영작가가 집필공간으로 사용할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