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일상나들이/책향기

일본을 이긴 한국인 - 장훈

윤주빠 2009. 3. 26. 13:22

일본을 이긴 한국인

 

책소개

일본 프로야구를 불태운 ‘장훈’의 자서전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장훈의 인생 역정과 일본 프로야구사에서 3,000안타라는 신화를 창조한 장훈의 야구 인생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그는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일본으로 귀화를 거부하고, “나는 한국인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했던 한국인 장훈의 야구 인생을 엿볼 수 있다.

1980년 5월 28일, 재일한국인 장훈은 일본인 투수 야마구치 다카시의 공을 쳐내기 위해 맞섰다. 투수는 변화구를 던지며 범타를 유도했다. 하지만 장훈은 빠른 공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손끝의 느낌이 어찌나 짜릿했는지 묘한 쾌감이 감돌았다. 공은 오른쪽 담장을 넘어 2점 홈런이 되었다. 이 홈런으로 장훈은 불멸의 기록인 3,0000안타를 달성하게 된다. 일본 프로야구사에서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금자탑을 재일한국인 장훈이 세웠다.

장훈의 야구 인생을 뒤돌아보면, 노력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또한 재일한국인이라는 ‘천형天刑’ 때문에 온갖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중학교 때에는 ‘조센진’이라고 친구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고등학교 때에는 재일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경기에 출장할 수 없었다. 경기장에서도 일본 관중들은 더그아웃 벽에 “장훈을 죽여라”라는 낙서까지 써놓았다. 그러나 장훈은 울분과 분노를 가슴속 깊숙이 묻어두었다. 그러면서 안타나 홈런을 때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시원한 복수다.”

장훈이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3,000안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장훈은 어릴 때 화상을 입어 오른손에 장애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왼손잡이로 전향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3,000안타가 신화가 될 수 있고, 그의 불굴의 투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저자 소개

저자 : 장훈

19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 오즈마치大洲町 현縣에서 아버지 장상정張相禎과 어머니 박순분朴順分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이지만, 아버지가 먼저 도일度日하고 그 후에 어머니는 가족들을 이끌고 현해탄을 건넜다. 이때부터 장훈은 재일한국인이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단바라段原 중학교 때에는 ‘조센진’이라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단바라의 깡패’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 장훈은 야쿠자들과 어울리며 불안하고 암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렵게 오사카의 나니와 상고浪華商에 들어가고 난 후 야구에 재미를 붙이면서 배트를 휘두르며 울분과 분노를 토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59년에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에 입단한다. 그리고 그해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한다. 그리고 23시즌 동안 일본 프로야구사에 숱한 기록을 남기고, 1980년 롯데 오리온즈에서 3,000안타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1981년에 은퇴했다.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도에이 플라이어즈(1959~1972), 닛타쿠홈 플라이어즈(1973), 일본햄 파이터즈(1974~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1976~1979), 롯데 오리온즈(1980~1981) 등 23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출장 2,752경기, 타율 3할1푼9리1모, 안타 3,085개, 홈런 504개, 타점 1,676점, 득점 1,523점, 도루 319개, 2루타 420개, 3루타 72개, 끝내기 홈런 6개, 희생플라이 90개, 고의사구 228개 등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4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하고, 최고 출루율 9회(1962, 1964, 1967~1970, 1972~1974), 수위타자 7회(1961, 1967~1970, 1972, 1974) 등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답게 프로 입단 첫해에 2루타로 안타 행진을 시작해서 1972년에 2,000안타, 1980년에 3,000안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특히 1970년의 타율 3할8푼3리는 당시 일본 프로야구 최고 기록이었다. 195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과 1962년 퍼시픽리그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닫기

역자 : 성일만

195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대륜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사회부를 거쳐 1985년부터는 일간스포츠 야구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목차

1회 타격왕이 되기까지
붙어버린 손가락
왕짱을 만나다
'마음의 공’을 품다
어머니의 조국

2회 야구 소년의 꿈과 현실
외야울타리의 개구쟁이들
주먹 때문에 거절당한 고등학교
고시엔 구장을 꿈꾸다
오사카 행 열차를 타다

3회 절망의 나날들
‘장훈용 도시락’
해프닝으로 끝난 거인 입단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다
뜻밖의 명령
야마모토의 우정
난생 처음 밟아본 고국 땅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4회 신인왕과 수위타자
첫 안타와 홈런을 때리다
‘꽃의 1959년 선수들’
스기우라 징크스
“내 탓이야, 가난 탓이야”
상품으로 받은 오토바이
역도산을 만나다
중절모를 눌러쓴 야구감독
좌익수 교대!
첫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다
불타는 복수심

5회 우승에서 MVP까지
우승을 향한 전주곡
첫 스승, 마쓰키 코치의 조언
누가 MVP인가?
고마자와의 망나니, 우승을 거머쥐다

6회 수렁에서 탈출하다
끝없는 추락
감독은 외로워
‘장훈 시프트’
브라질에 두고온 슬럼프
‘감동 거사’ 오스기

7회 년 연속 수위타자를 차지하다
배트에 날개를 달다
“도에이 벤치에는 감독이 두 명 있다”
브룸필드의 비밀 병기
‘10+51=3관왕=우승’
사라져버린 투지
꼬마 야구팬이 준 충격

8회 다시 혼미 속으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다
5타자 연속 홈런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대가 끝나다
프로 입단 후 첫 번째 번트
‘타격의 신’에 오르다

9회 명문 자이언츠에 가다
17시즌 연속 100안타를 기록하다
정말 거인 유니폼을 입을 수 있습니까?
왕정치와 명콤비를 이루다
어둠 속에서 300번 스윙을 하다
‘승리를 부르는 OH포’
시바타의 스포츠맨십
거인이 우승하다
젊음에 도박을 걸다
“3번 왕정치, 4번 장훈”
구단이 내민 백지수표

10회 3,000안타를 향해
시력을 잃다
한·일 야구를 잇는 다리
롯데 오리온즈에 입단하다
,안타 고지를 정복하다

11회 나의 인생 나의 야구
23년이라는 긴장의 나날
아시아적인 야구를 위해
꼴찌에게 박수를

12회 내가 본 장훈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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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나는 스스로 절규했다. 이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남들보다 배트를 더 많이 휘두르지 않으면 패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쿄에 있을 때나 원정 때나 경기를 끝낸 후 숙소에 돌아오면 항상 300개 스윙을 하기로 결심했다. 두 시간이 걸렸다. 경기에서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나 그렇게 한다. 진짜 승부는 그 다음부터다. 남들이 쉴 때 연습을 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다. 전력으로 배트를 휘두르고 나면 10~20분 만에 녹초가 된다. 휘두를수록 잘 칠 수 있다며 나 자신을 달래 300개를 채운다--- , p. 12

특히 불고기를 좋아했는데 목구멍에 걸려서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얼마나 많이 먹었으면 위경련이 다 났을까.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다 내 탓이야, 가난 탓이야”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음 날 아침 우유 한 잔만 먹고 거뜬히 경기에 출전했다. 첫 시즌을 마친 후 처음으로 열린 동서東西 대항전에 올스타로 뽑혀 참가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선배들뿐이었다. 어느새 그들 틈에 나도 당당히 어깨를 내민 것이다.--- , p.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