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창애정(滄厓亭)....모든것을 다 버린 고고한 한 사람의 기품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경북 봉화군 소천로 140-105에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7호인 봉화 창애정(滄厓亭)....
봉화 창애정(滄厓亭)은 조선 영조때의 학자인 창애 이중광(滄厓 李重光) 선생이 그 당시의 선비들 그리고 시인 묵객들과 풍류를 즐기면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춘양목을 가져와서 세운 정자입니다.
창애 이중광(滄厓 李重光) 선생은 1617년인 광해군 9년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폐모론이 대두되자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경학 공부에 매진을 했고 인조 4년인 1626년에는 군자참봉에 제수되었는데 그 자리 또한 물리치면서 스스로 자리를 버렸다고 합니다.
또한 병자호란때는 송라도찰방겸 수륙군향차원에 제수되었다가 정벌을 하기 위해 북진하던중 조령에 도착했는데
급작스러운 강화 체결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며 다시 벼슬을 버리고 청원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행정이라고 이름을 지은후 다시 후학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1639년에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창평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스스로 버리고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매진하며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었던 하홍도 강헌지와 교류하며 언제나 푸르른 청산(靑山)처럼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한없는 청산(靑山)속에 살다가 자유롭게 놀던 몸이
어이하다가 오릉(五陵)의 손님이 되었던가
내일 아침 말타고 청산(靑山)에 돌아가면
여전히 청산(靑山)속 사람이 되려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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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7년인 1741년에 쓴 시인데 경기전참봉에 잠시 부임하였다가 벼슬에 뜻이 없어서 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지은 시라고하는데 다시 읽어봐도 너무나 멋지고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는것 같습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과 고집이 있었던 푸르른 소나무 창애 이중광(滄厓 李重光)
본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걱정하며 후학의 교육에 힘을 썼던 그 분의 마음...
정치인은 어떠해야하고 학자는 어떠해야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시는 푸르런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그 분의 모습.
요즘같은 시절에 참 그리워지는 분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