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 김소진
金昭晉 도시적 감수성의 개인주의로 무장한 신세대 문학이 득세하던 90년대에 김소진의 작품은 희소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시 서민들의 곤궁한 삶과 거대조직에서 낙오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어린 묘사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현장을 현실감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특유의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진 한국어는 눈밝은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95년부터는 다니던 신문사마저 그만두고 당시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일하던 서교동의 한 출판사 구석에 자리를 얻어 '전업작가'로서의 의욕을 불태웠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암이 그를 덮쳤고, 동료 문인들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97년 4월 한국문학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친구이자 시인 안찬수는 김소진을 이렇게 기억하기도 했다.
"그는 글을 쓴 사람, 그것도 소설을 쓴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생활인이었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되겠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한 친구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나에게 그의 그 성실한 태도는 언제나 어떤 어른스러움으로 다가왔는데 그 어른스러움은 나의 유목민적...도시적 감수성의 개인주의로 무장한 신세대 문학이 득세하던 90년대에 김소진의 작품은 희소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시 서민들의 곤궁한 삶과 거대조직에서 낙오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어린 묘사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현장을 현실감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특유의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진 한국어는 눈밝은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95년부터는 다니던 신문사마저 그만두고 당시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일하던 서교동의 한 출판사 구석에 자리를 얻어 '전업작가'로서의 의욕을 불태웠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암이 그를 덮쳤고, 동료 문인들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97년 4월 한국문학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친구이자 시인 안찬수는 김소진을 이렇게 기억하기도 했다.
"그는 글을 쓴 사람, 그것도 소설을 쓴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생활인이었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되겠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한 친구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나에게 그의 그 성실한 태도는 언제나 어떤 어른스러움으로 다가왔는데 그 어른스러움은 나의 유목민적인 속성과 비교한다면 농경민적인 속성이라고 말해야 될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한겨레신문사 앞의 어느 술자리에서 세 친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설전을 벌이던 것이. 그때 세 명의 삼십대 초반 문학도들은 그 가운데 한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를 놓고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소진이 그 자리에서 말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이었다. 나는 김소진과는 정반대로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두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다른 한 친구는 계속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말하는 그 모습 속에서 나는 뚜렷하게 김소진의 '현실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다른 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아버지의 자리」에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었다. "애비 노릇을 그렇게 허는 게 아니다. 애비라는 게 돈벌이를 고정적으로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일 국량이 제대로 서야 온전한 애비지. 그 좋은 직장을 부젓가락 쥔 어린애마냥 화들짝 뛰쳐나와서는 제때 어디 한번 식구들이 맘놓고 의료보험증 갖고 병원엘 가보나, 이거 원 이 지경이 되도록 팽개쳐놓는 게 글쎄 시상에 그 잘난 애비 노릇이란 말이냐? 너도 참 딱도 허긴 쯧쯧."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얼마 뒤 이번에는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른바 전업작가의 길로 나서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볼 때 그 길은 그의 '현실주의'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그와 내가 전혀 거꾸로 된 입장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그만두어야겠다고 하고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마침내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었을 소설에 '투신'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즈음의 그의 생활감각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까발리자면 저간의 내 사정이란 이렇다. (……) 근 석 달 동안 내가 집에 벌어다 준 수입은 대략 원천징수액 빼고 칠십사만원쯤이다. 어느 계간 문예지에 오랜만에 실은 단편소설 「그대 늙었을 때」의 원고료 사십팔만여원, 편두통에 잘 듣는 알약 암포르탈로 유명한 삼화제약 사보에 실은 콩트 「이브의 경고」 원고료 십육만여원 그리고 대학 후배가 편집장으로 있는 바둑잡지에 나한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소개해주는 글 「수호지로 가던 마음」을 쓰고 받은 구만여원이 고작이다."(「경복여관에서 꿈꾸기」)"

여자들은 아버지가 없을 때면 곧잘 우리 부엌으로 몰려들었다. 갑식이네 구멍가게에 세를 살고 있는 전필례도 우리집 부엌을찾아오는 단골이었다. 그녀가 오면 엄마는 양푼에다 밀가루를 풀어서 통파를 놓고는 그녀가 박카스 병에 가득 따라갖고 온 질 나쁜 낙화 생유를 프라이팬에 두르고 파전을 자글자글 부쳐먹곤 하였다.
전 아무것도 몰라요 왠지 집이 목포라는 생각이 드는 것하고...그리고 또? 엄마는 다섯 살 땐가 기찻간에 버려졌다는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틈만 나면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있었다. 대답을 되살려고 틈만 나면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있었다. 대답을 미적미적 늦게 하거나 우물쭈물하면 그만큼 프라이팬 안의 부침개가 타들어가기 때문에 그녀는 부침개가 적당히 익을 만하면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